도시 서울. 침전식욕




1
누운 옹벽마다 희끗한 들풀이 자라고
뭉개진 손톱으로 선민들의 뒷덜미를 짚어보는 거미들.
팔꿈치 피딱지로 맺힌 계절의 갈빗대가 부러지고
빗물받이의 비늘은 꿈속처럼 벗겨졌다.
기찻길, 체모가 날 자리마다 녹 난 쇠막대 우우-일어난다.
뒤죽박죽 달리는 광폭한 안개,
같은 속도로 붙어 따르는 나무들에게도 멱살을 내어주지 않는다.
약물에 무른 건판 위에 남은 것은 마르고 없는 개울의 허벅지
폭파된 다리 위의 귀신
어제를 빌어먹을 회충들.

도시는 기만이 심하고 빨랐다
얇게 펴고,
치대고 잡아늘리고
다시 모두어 뭉갰다.
목숨을 삼차원으로 충격했다.
누군가는 길목에 꽂힌 침처럼 멈춰 사진찍었다
인간 전부를 그러안고 가는 안개의 옆얼굴을 찍었다.
누군가는 거기에 같은 속도의 회색으로 들러붙고
강둑 아래엔 눈구멍 없는 개들이 울면서
먼지구름을 관통한 낮의 한가운데로 녹아들었다.



2
쇠바퀴 구르는 소리에 여자는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의 반이 희고 반은 검었다. 네모진 절반의 상이 틀에 끼운 판유리와 바깥 눈밭의 반사광으로 이뤄짐을 깨닫고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실장갑을 낀 손바닥 아래쪽으로 끈 모양의 멍이 드러난 손목. 제 살에 면을 이룬 푸르고 누런 무늬를 보자 여자는 눈꺼풀을 떨었다. 두 눈이 방 안 어둠에 익자 의자에 놓인 자신의 무릎과 구둣발 너머로 마루판이 보였다. 쪽마루 틈마다 먼지는 수 세기의 켜를 이루었다. 여자의 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난로가 재를 밟고 죽었다. 여자가 기댄 벽 맞은편에 비틀비틀 흐르는 붓으로 써놓은 것은 발차 시각을 알리는 숫자들이었다.
캄캄한 대합실.
찬 공기가 멀고 엷게 느껴졌다.
여자는 다시 환한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바퀴를 단 기다란 그림자가 하늘과 들판 사이에서 점으로 쪼그라들었다.
여자는 제 몸을 껴안고 주변을 살폈다. 딸린 짐은 없었다.
바깥에서 눈덩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꼼짝 않고 앉아서 맞은편 어지러운 수의 무리를 보았다. 사람 셋이 문을 열고 지붕 밑으로 들어왔다. 검은 상의를 입은 두 소년과 노인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멍청히 서서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소년 중 키가 더 큰 쪽이 걸어와 난로를 들여다보았다. 소년이 창가에 멀거니 앉아있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 여자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소년들은 문가에 기대 섰고,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여자가 앉은 긴 의자의 끝에 앉았다.
소년들이 윗옷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불을 붙일 때, 여자는 다시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3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 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보면 축축한 등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詩.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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